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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5(목) 09:13
부부가 함께 읽는 ‘부부에세이' 12호/뒤끝 없는 어린아이가 되어

양윤덕(시인, 수필가/담양시댁)

BM뉴스
2020년 09월 18일(금) 09:54
아침에 늦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었다. 치열한 전쟁 같은 그 고약한 장면에 몸서리가 쳐졌다. 잔잔한 노래가 울려 퍼지던 거실에 시끌벅적 남편과 아내의 고성이 오고갔다. 순식간에 식탁에 차려놓았던 반찬그릇들이 남편 손에서 거실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산산 조각나고, 거실바닥은 폭탄이 지나간 것처럼 유리조각이 난무했다. 이유는 조용조용 대화를 하다가,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한마디에 가슴에 통증을 느껴 화를 참지 못한 아내가 불화살 같은 말을 쏴버린 데서 촉발되어, 서로가 야수가 되는 모습으로 변해 공격을 하는 장면이 되고 말았다.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전쟁 같은 그 순간에 몸서리치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꿈이었다.

어느 날 MBN 티브이 속풀이쇼 ‘동치미’에서 한 젊은 기혼자 패널이 한 말이다. 그녀는 꿈속에서도 새겨들어야 할 귀한 말을 했다. 오랫동안 가슴이 뭉클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헤어질 것이 아니라면, 싸울 때도 서로 상처를 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해요” 그게 그녀의 철학이라고 했다. 3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나보다 훨씬 어린 심 씨 성을 가진 그 여성패널이 그토록 깊은 말을 하다니 놀라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새삼 나를 돌아보며 화날 때일수록 스스로 찬물을 끼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교훈으로 무장을 해도 화가 날 땐 백가지 말이 소용없게 될 때가 있다. 잔불이 강한 회오리에 의해 온 산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파도가 뜬금없이 해일을 일으켜 둑을 무너뜨리는 일처럼, 우리 부부도 가끔은 늦잠자다 꾼 악몽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줘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귀하디귀한 행복의 시간들을 날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티끌 하나 날아왔을 뿐인데, 그 순간만큼은 상대의 말이 산에서 날아온 우락부락한 큰 바위덩이 같은 충격으로 다가와 머리가 박살나는 지경, 그러니 이성이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것이다. 방금까지 웃고 지내다가 갑자기 ‘욱’ 하고 회오리를 일으켜 돌변하는 것을 보면, 마치 안에 감정도깨비가 활동하는 때인가, 훼방을 부리는 시간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날엔 전쟁은 짧을수록 좋다. 장기전을 오래 못 버티는 여린 마음이기에 나는 스스로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패잔병 같은 심정으로 그에게 기대했던 마음을 다 내려놓는다. 이기면 뭐하고 지면 뭐할 것인가, ‘포기는 평안을 낳는다.’는 말이 왜 있겠는가. 갈등에서 오는 심적 고통을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가정 평화주의자다. 평화주의니 수습을 위해 동굴 같은 내면으로 들어가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 멍하니 앉아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때 나의 언행 하나하나를 살핀다. 상대방이 한 말과 행동은 내 머리 속에서 아예 지우고 오로지 내 말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평소 내 마음 같지 않은 엉뚱한 마음이 날린 불화살에 상대가 얼마나 가슴을 다쳤을까, 미안한 마음이 나를 눈물짓게 한다. 남편의 말과 행동은 아예 떠올릴 필요가 없다. 그도 나처럼 자신의 마음을 수습 중일 테니, 나는 내 감정만 수습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전쟁 속 억센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뒤끝이 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된다. 가슴에 한 방울 두 방울 미안한 감정이 고이고, 남편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싶을 때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고 다가가면 남편도 마음이 풀려 서로 포옹으로 화답을 한다. 내 동굴에서 나올 땐 측은지심이 통과의례다.

설령 남편 쪽이 먼저 촉발시킨 싸움일지라도 내가 수습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다. 그게 가정 평화주의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도 두 사람이 노력하면 쉽게 원상복구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수습하는 과정에서 들여다보면, 그 감정의 잔해 속에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껴안지 못한 채 좀생이처럼 겉돈 면면이 대화 곳곳에 널려있다.

수습이 어느 정도 되어 옥신각신 다툴 때의 억센 고집과 거친 목소리도 온데간데없어지면 뒤끝 없는 어린아이의 해맑은 마음을 느낀다. 어린아이가 되어 순수한 마음을 가지면 한 순간순간이 남편이 있어 행복하고, 남편이 있어 기쁜 일만 보인다. 귀한 내 짝이다. 우리의 본래마음은 뒤끝 없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그런 어린아이가 한 집에 함께 사는 것이다. 우리의 다툼은 늘 아무 일도 아닌데서 시작되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또 돌아서서 웃는다. 잠시 미워 밀어냈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곁에 있고, 내동댕이쳐졌던 사랑도, 정도,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자릴 잡고 행복을 채운다.

미풍 같은 따스한 숨 바람이 서로의 가슴 사이를 오간다. 하늘도 기쁜지, 먹구름 같은 깜깜한 새장을 열어 뽀얀 새를 띄우고, 달빛을 동원해 한낮의 제일 밝은 해를 띄워 다른 날보다 두 배 세 배 더 밝은 날로 만들어준다.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이 부시다. 남편이 나를 바라보는 눈도 부시다. 창가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 우리 둘 맘 같지 않은 일들을 부끄러워하며 수줍은 미소가 따뜻한 숨 바람이 되어 두 가슴사이로 함박눈처럼 내리고 또 내린다.

늦잠 속 악몽 이야기도 꿈결 속으로 잦아들고, 처음 말문을 열고 나오는 남편의 소리에 창가의 나뭇가지도 한들한들 화답하고 있다.

“여보, 우리 싸우면서 그럭저럭 살지 말고, 하루하루 소꿉놀이 하듯 그렇게 재미지게 살자구.”

“당연하지요. 어제 죽었던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오늘, 그 하루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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